Her 그녀: 디스토피아를 팬시하게 표현하기 영화 보기

Her 그녀: 디스토피아를 팬시하게 표현하기

근미래의 사랑을 다뤘다고 광고했다. 시나리오가 뺴어나서 상을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음악이 너무나 아름답더라는 이야기도 많았다. 어쨌든 요아킨 피닉스와 에이미 아담스라기에 무턱대고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참 의외였다. 기대했던 모든 것과 너무나 달랐다. 아니 음악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몇몇 노래는 계속 마음에 남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것, 시작했다 스러지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해 숱한 영화와 소설과 드라마가 이야기했다. 당신이 꿈꿨던 사랑과 당신이 실제로 겪었던 사랑의 간격은 이만큼 정도인지 않느냐고 다들 일제히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영화만큼 집요하게 남자의 사랑, 찌질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마음을 이야기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대부분 약간의 치장과 조금의 장식을 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하곤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르다. 제목은 [그녀 her]지만 실제로 이 작품이 보여주는 내용은 '그'다. 지치고 외롭고, 상처로 빼곡하지만 누군가를 안고 싶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안기고 싶어하기를 원한다. 실제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러나 그 '누군가'가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분명한 "그녀"이다. 애써 부정하고 외면하고 달아나려 해도 원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결코 만날 수 없는,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그렇게 슬픈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정작 주인공인 테오도르가 입고 나오는 옷은 계속해서 밝은 오렌지 컬러 일색이다. 마지막 장면 외에는 그는 계속해서 붉으느 계통의 옷을 화사하게 입고 나온다. 그가 일하는 직장도 캔디 컬러로 아름답게 정리되어 있고, 사용하는 컴퓨터의 os 바탕색 마저도 밝은 오렌지 계통이다. 기묘한 것은 그처럼 화사한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외기는 안개에 싸인 듯 뿌옇기만 하다. 바닷가에 간 잠깐 외에는 내내 뿌옇고 습기 차고 무겁게 내려 앉아 있다. 그 배경이 로스앤젤레스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흐릿하기까지 하다.

이야기의 무거움과 실내 세트와 의상의 발랄함, 외부의 차분함과 어두움. 이들이 이루고 있는 기묘한 조화는 영화의 분위기를 조금 더 상승시키고 고조시킨다. 대사를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화면 전반에 흐르는 기색만으로도 영화의 대부분을 짐작할 수 있는.

몇 장면은 대단히 불편하다. 남성 입장의 어떤 장면들. 특히 침대 위주의 에피소드는 참 견디기 어려울 만큼 메스꺼웠다. 실제감을 위해 그토록 생생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상치 못했던 장면 전개가 과연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초반까지 영화에 몰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낭만적인 듯 전개되는 몇 장면은 무리하다 싶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싶기도 한 것이 내내 마음을 조이게 만들었다. 애초에 결말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일까? 어찌 됐든 영화의 결말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 과정의 치밀함과 생생함이 여러가지 생각을 오가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근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다뤄진 바 있다. 여러가지 방식의 사랑에 대해서도 충분히 다뤄졌다. 새로운 매체 환경이 인간을, 또는 인간 사이의 정서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예견도 수많았다. 그러나 가장 팬시하게 암담한 결론. 그러나 그렇지 않으리라고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매체 때문이 아니다. 늘어나는 이혼과 자살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며, 사실 근미래로 국한된 일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는 있을까?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까? 어찌 됐건 그 모든 고통에 대해 위로는 될 수도 있겠다. 사실, 산다는 것과 사랑이라는 것에 어떤 정답이 존재하겠는가? 우리는 이미 그 답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영화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누고 싶은 일말의 기대 또는 환상 뭐 그런 것일 테니 말이다. 알량한 기대면 어떤가, 또 보잘 것 없는 환상 따위면 또 어떤가?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 환상이라도 희망이라도 부여잡고 가는 것이겠지. 때때로 문득 그런 희망에라도 눈길 주며 사는 것이겠지.


김병욱 월드의 달라진 것들 - 감자별 종방에 부쳐 TV 읽기

김병욱 월드ㅡ 퇴행인가, 변화인가?


김병욱의 역사란 한국 시트콤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물론 송창의와 은경표라는 PD가 있어 한국판 <프렌드>라 할 수 있는 <남자 셋, 여자 셋>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현업을 떠나 있고, 그 이후에도 그다지 좋은 전례를 남기지 못했다. 타사의 여하한 시트콤들 역시 다양한 주제와 시도를 거듭했으나 몇몇 예비 청춘스타만을 남기도 잊혀졌다. 덕분에 김병욱은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또는 유일의 성공한 시트콤 감독으로 남아 있다.

김병욱은 대표작도 무수하다. 송혜교와 김래원이 나왔던 [순풍산부인과], 서민정이 말 안 듣는 엉뚱한 딸로 나왔던 [웬만하면 그들을 말릴 수 없다]에서부터 최근의 대단한 히트 시리즈였던 [하이킥]이 있다. 물론 세 번째 하이킥은 크리스탈과 이종석의 다소 잊혀진 데뷔작처럼 기억되고 있긴 하지만 박하선이라는 불후의 허당 캐릭터를 성공시켰다.

김병욱의 시트콤은 기본적으로 대가족이다. 할아버지 세대가 등장하고, 그들의 자녀들 2~3인, 그 자녀들의 자녀. 그런 식으로 적어도 10인 내외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그 중에는 무능한 자녀가 있기도 하고, 말썽부리는 아이가 있기도 하고, 고집불통에 이기적은 부모 혹은 아이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통제하고 조정하는 비교적 이성적인 가족 구성원도 등장한다. 요컨대 김병욱의 세상이란 그들 주인공들이 일궈내는 충돌과 포개짐이 가득한 공동체인 셈이다. 때때로 그 대가족이 직장 동료나 일시적 동거인, 친구 등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가족으로 보아 무방하다. 그리고 세상의 종결(시트콤의 마지막)은 언제나 일시적인 동거가 마무리되는 순간에 일어난다. 구성원 중 몇 사람의 이민(지붕 뚫고 하이킥의 세경이와 신애)이라든가 해외 봉사(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윤계상)혹은 유학(거침없이 하이킥의 신지). 그게 아니면 이사(감자별의 나진아) 나 죽음 등이 그것이다. 시트콤의 개시가 그들이 한 가족과의 동거로 시작된 경우가 대부분임을 생각한다면 사실 이런 식의 구성은 매우 자연스럽다. 만남과 이별, 회자정리라는 사자성어가 설명할 수 있는 서사구조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구조 덕택에 시청자가 새로운 시트콤에 대해 낯설고 주저하는 만큼 극중 인물들도 서로에게 어색해 하고 적응하려 애쓰는 것이 초반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시트콤은 그래서 시간이 흘러 갈수록 극중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와 케미로 흥미를 더하게 되고 최종 결말에 이르러 시트콤 속의 인물에 대한 몰입도가 커져 분리불안을 일으킬 정도의 슬픔(?)과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런 탓일까? 김병욱 감독의 엔딩에 대해서는 언제나 말이 많다. 아니 그토록 충성도가 높던 시청자들의 푸념과 비판이 저주에 가까울 지경이 되곤 한다. 특히 그 절정(혹은 최악)은 아마도 [지붕 뚫고 하이킥]의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일텐데, 그 끔찍한 새드엔딩은 지금도 우리 영화와 드라마에 전례가 없을 처참한 결론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이전에도 김병욱 감독은 주요 배역의 갑작스런 죽음을 결말에 배치하기도 하고('웬만해선 그들을 말릴 수 없다'의 박정수), 가장 지지했던 커플들의 이별('거침없이 하이킥'의 최민용과 서민정)로 결말을 마무리해 시청자들의 원성을 산 바 있다. 그러나 신세경과 최다니엘의 교통사고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시청자들을 극렬하게 반발했고, 디씨갤러리에 형성되어 있던 강력한 팬덤은 그야말로 공황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 이후 신세경의 활동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은 그 결말의 여운이 강력하게 남은 까닭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최다니엘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어 그런 짐작이 부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그 허망함의 여파가 극에서 불행하게 지냈다고 볼 수 있는 신세경을 그나마 영원히 묻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반면 황정음은 성공일로에 놓여 있다. 시트콤 당시에는 연기력 논란도 많았고 이후 연이은 대작 캐스팅에 대한 비아냥도 있었지만 의외로 눈물 연기와 코믹한 연기를 잘 소화해내며 시청률의 여왕이 되었다. 특히 작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미니 시리즈 [비밀]은 황정음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날려 버리는 강력한 한방이었다.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은 이처럼 방영 당시의 화제성은 물론 그 이후에도 해당 시리즈에 출연했던 젊은 배우들의 변화 과정을 보는 즐거움도 준다.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면 거의 대부분의 예전작 출연자들이 카메오로 출연해 시트콤끼리의 연관관계(?)도 부각시켜 주는 등 이른바 김병욱 월드의 재구성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감자별]의 경우는 예전만 못한 결과를 안고 비교적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120회에 이를 때까지 큰 화제도 없었고 출연진 중 누구도 광고에 캐스팅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하연수가 이종석과 함께 화장품 광고를 하긴 했으나 기존에 김병욱 피디의 시트콤 주연들에 비하면 어림없는 성적이다. 굳이 황정음이나 신세경(가장 성공했던)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백진희나 박하선(가장 실패했다고 평가받던)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여진구나 고경표도 마찬가지다. 고경표는 이를테면 최민용이나 최다니엘의 스핀오프인 셈이고, 여진구는 윤시윤의 스핀오프로 보이는데 전혀라고 할 정도의 반응이다. 여진구의 경우 아역으로 상당한 팬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품을 통한 세몰이는 실패한 모양새다. 고경표는 기존의 코믹한 이미지 때문이었는지 냉철한 전문 경영인의 이미지를 시트콤 바깥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물론 아쉬운 점은 참으로 많다. 이들 배우는 기존의 김병욱 시트콤 주연들처럼 생짜 신인도 아니었고, 연기력 논란으로 시끄러운 이들도 아니었다. 서예지의 경우 연기에 아쉬운 점이 적지 않았지만 타고난 몸매와 독특함으로 타개해 나갔고, 실질적인 주연이라 할 수 있는 하연수와 여진구, 고경표는 워낙 다재다능해서 기대가 적지 않았다.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이 마냥 재미있기만 한 게 아니라 다소의 슬픔이 저변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배우의 역량은 크게 작용한다. 이번에는 그런 슬픔과 즐거움의 미묘하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최적의 배우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의 적극적 반응과는 만나지 못했다.

김병욱 감독은 이제 더 이상 일일 시트콤은 하지 않겠노라 천명했다는데 사실 문제는 매일 찍어대는 방식이 아닌 것 같다. 특히 이번 [감자별]은 그의 전작에서 없던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먼저, 모든 출연진이 아주 짧게라도 매회 등장했다는 것이다. 물론 줄리앙과 그의 여자 친구 미나, 장기하 등을 제외하고 가족들은 정말 짧게라도 등장했다. 기존의 시트콤에서는 몇몇 역할들이 돌아가면 주인공을 맡는 식이라 러브 라인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회 등장할 수는 없었다. 두번째 다른 점은 주인공들의 극단성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서예지는 기존의 황정음이나 신지와 달랐다. 적당히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고, 달라진 상황에서 자신의 사치하는 습관을 바꾸려 노력한다. 하연수도 마찬가지다. 신세경처럼 극단적으로 어둡지 않았다. 백진희나 김지원처럼 청승맞지도 혼자 붕 떠있지도 않았다. 일도 열심히 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앞일을 생각한다. 대표님이나 홍버그와의 로맨스에서도 비교적 냉정했다. 비교적 담담하게, 자신의 모두를 거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세 번째, 기존의 시트콤이 매번 두 개의 에피소들을 보여줬다면 [감자별]에서는 세 개의 에피소드를 보여줬다. 덕분에 시간도 늘어 났고, 매회 모든 등장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보는 입장에서는 사실 비교적 긴 러닝타임이 좋았다. 모든 인물들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궁금한 커플들의 이야기가 매번 다뤄진다는 점이니까 이야기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네 번째 다른 점은 직장이 배경이었다는 점이다. 매번 학교나 병원 같은 데가 늘 주요 배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사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고 아이들 자라는 문제 등이 주요 쟁점이었던 반면 [감자별]의 배경은 완구 회사였기 때문에 산업 스파이라든가 적대적 M&A 같은 소재가 등장했다. 다른 비슷한 소재의 미니 시리즈에 비하면 부족하기 그지없는 구성이긴 했지만 매번 비슷비슷한 배경이었던 것에 비해 새롭고 신선했다. 완구 개발과 판매에 대한 소재 활용도도 나쁘지 않았다. 다섯 번째, 해당 세계를 파괴하려는 확실한 적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기존의 시트콤은 내부에서 알력과 다툼이 있기는 했어도 그 구조 혹은 그 세상을 부수려는 당사자는 없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해체되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적대 세력은 없었다. 결말 부분에서 누군가의 부재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쓸쓸한 인간군상이 보여지긴 했지만 철저히 부서지고 파괴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오이사와 두 박대리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완구회사를 망하게 하려 했다. 결국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시리즈 내내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과 사고는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데 상당 부분 일조했다.

물론 더 많은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아니 주장하는 차이점이 사실은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다. 사실 두드러진 적이 있다는 점 말고는 특기할 사항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는 내내 뭔가 달라진 게 있다는 느낌은 버릴 수가 없었다. 기묘하게 달라진 지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마치 세계관이 달라진 듯한 느낌도 들었다. 어찌 됐건 [감자별]은 허무하게 결말을 냈다. 가장 애정했던 하연수와 여진구 커플의 돌연한 결별만을 남기고. 사실 산다는 게 그렇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끔찍한 순간은 연달아 오는 경우가 많다. 거의 대부분의 이별은 예정되지 않았거나 미처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달려든다. 그래서 그토록 마음 아프고 괴로운 것이다. 김병욱 감독이 늘 보여주려고 하는, 그가 애당초 전달하려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니 너무 행복해도 행복해 하지 말고, 너무 슬퍼도 슬퍼하지 말라는 것일까? 아니. 그러니까 기쁠 땐 더 맘껏 기뻐하고, 슬플 땐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 흘리라는 것이리라. 흔히 말하듯 모든 것은 정말 단 한번뿐이니까 후회가 남지 않으려면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여진구가 사라지기 전에 "비둘기 집"을 만들고 싶어했던 것처럼, 하연수의 이사간 집에 모든 정리정돈을 다 하려던 것처럼 그 순간을 붙잡으라는 것. 그래야 미련도 슬픔도 덜하다. 지나간 다음에 가장 괴로운 것은 다하지 못한 마음이 아니던가.
세월호 사건이 벌써 한달이 넘었다. 그동안 정상적인 생활은 했지만 마음 속 슬픔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컸다. 모든 것이 슬펐고, 모든 것이 어이없었으며, 그래서 매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글이라는 것을 쓴다는 게 엄두가 안 났다. 그동안 [감자별]이 끝났고, [밀회]도 끝났다. 쓰고 싶은 얘기가 참 많았던 두 드라마였는데.

아직도 안녕하지 못한 대한민국에 대한 슬픔이 마치 [감자별]의 마지막처럼 느껴진다.



한공주, 너는 잘못한 게 없는데 영화 보기


[한공주], 국제영화제 8관왕에 빛나는 올해의 영화다. 출연했던 배우들의 호연에 대한 이야기도 끊이지 않았고, 실화를 기반으로 한, 실상은 자극적이기 이를 데 없는 소재도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사실, 이런 문제가 가져오는 파장은 언제나 강렬하다. 그것이 비록 순간적인 것일지라도.
영화보는 내내 계속 생각했다. 아니 저절로 떠올랐다. [도가니(황동혁 감독, 2011)]와 [꽃잎(장선우 감독, 1996)]. 미성년을 대상으로 한 성적인 폭력은 언제나 관객에게도 생생한 고통을 준다. 표현 정도에 따라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말이지 두려웠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보고 나서 무언가 끄적이기 위해 영화의 장면을 떠올려야 한다는 일은. 단순히 이야기가 흥미로웠다거나, 구성이 탄탄했다거나,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로 얘기할 수 있는 영화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 영화 [한공주]는 안 그랬다. 터무니없이 고통을 강요하지도, 불필요한 괴로움을 들추지도 않았다. 피해자가 겪었을 법한, 피해자가 실제로 처했을 상황에 대해 실감나게 보여주긴 했지만 선정적이라거나 고통과 분노의 격랑을 과하게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필요 이상으로 감췄다. 과하게 덮고 누르고 때때로 드러낼 뿐이다. 마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영안실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조문객과 이야기하며 잠깐잠깐 그 사실을 잊는 것처럼 영화 속 공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수영도 하고, 친구들을 만들어 함께 노래도 한다. 비극이라는 게 사실 그런 게 아닌가? 숨도 못 쉬게 괴로운 순간은 실상 그리 길지 않다. 그걸 잊기 위해서라도 평범한 날이 바뀐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지옥같은 기억이 남는다.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고 몸의 기억으로도 남는다. 물론 [한공주]에서는 그 부분은 다루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삶으로 자연스레 복귀할 수도 있을 듯한 가능성을 보인다. 고무줄이 그가 지닌 탄성 덕분에 원래의 길이를 회복하듯 공주는 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우리를 안도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런 까닭에 사람의 삶이라는 것에 더 깊숙히 다가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틱하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미덕은 그런 게 아닐까? 물론 슬쩍 드러난 '사실'과 '진실'에 대한 구분도 정말이지 중요한 지점이긴 하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널뛰는 모든 것들. 지금 "세월호" 구조 상황에서도 손쉽게 알 수 있는, 언론과 당국과 그 모든 어른들의 짓거리는 '진실'에 대한 접근이나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실'까지도 너무나 간단하게 왜곡되곤 하는 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며 현실이고 '진실'이다. 덕분에 이 작품 '한공주'는 또 한번 현실이라는 외피를 입는다. 흘러간 옛 얘기를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잘 만든 영화이기도 하지만, 지난 며칠 온 나라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엄청난 재난(동시에 엄청나게 어이없는 관재이면서 인재) 상황을 겪고 보면 우리 모두가 여전히 한공주라는 것을 새삼 아프게 깨닫는다. 문제는 수영이 아니라는 것. 수영장에서 배운 헤엄치기는 강이나 바다라는 진짜 자연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그게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진실'인 셈이다.
정말이지, 슬프고 괴롭고 화가 난다.

이혼의 좋은 사례_드라마 응급남녀의 종방에 부쳐 TV 읽기

응급남녀의 종방에 부쳐

총 21회에 걸쳐 펼쳐진 이혼 남녀의 재회를 다룬 드라마 [응급남녀]가 끝났다. 겨울에 시작해서 한창 따스한 봄에 끝나니, 그들의 해피엔딩과 계절이 어울려 더 분위기가 사는 듯한 느낌이다. [응답하라. 1994]라는 엄청난 흥행작의 후속작으로서의 부담이 컸을 것이다. 아닌가. 오히려 그 정도의 반응은 꿈꿀 수 없으니 홀가분했을까? 크게 기대되지 않는 조합, 최진혁과 송지효 거플은 그렇게 시작했다.
우리나라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 배경은 정말로 배경에 불과했고, 절반 정도를 지나면서는 노골적으로 짝짓기에 몰두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짝정리'가 맞을까? 얽히고설킨 남녀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과거사 말끔하게 해결하기.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결말이 그런 국면이라는 점은 맞는데 마지막에 닥쳐서 허둥지둥 정리하는 것 같아 웃기긴 했다. 아마도 서브 남주의 약진에 힘입어 그 얘기를 끝까지 미루다가 저런 상황까지 밀린 것 같은데 이걸 비난해야 할지,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중반부까지는 서브 남주인 이필모가 상당히 약진했던 게 사실이다. 찌질하고 아픈 기억이 있는 전 남편 창민(최진혁 분)보다 일에서 안정적이고 압도적인 국치프(이필모 분)에게 끌리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창민에겐 철천지 원수같은 시어머니(박준금 분)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대부분의 경험을 살펴 보면 옛사랑보다 새로 두근거리는 사랑에 마음이 쏠리는 게 당연하다는데 진희(송지효 분)는 왜 갑자기 옛 사랑에 매달렸을까? 몇 번이나 거절하고, 친절한 행동까지도 불편해 했으면서 왜? '시아버지의 죽음'이 그 모든 잡념을 덮어버릴 만큼 강력한 사건이었을까? 시종일관 쿨하고 시크했던 지혜(최여진 분)가 갑자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던 에피소드도 기묘하긴 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터져 나온 본심이라면 쉽게 덮어지지도 않을텐데 금방 아닌 척하는 모습도 이상했다. 사실 그런 연배와 관록에 그런 식으로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 아닌가?
그렇지만 이러니 저러지 해도 [응급남녀]는 참 무난하게 극을 이끌어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고 싶다. 마지막 한두 회에 티가 있긴 하지만 최근 어떤 드라마보다 무난한게 자신의 호흡을 가져갔다는 건 분명하다. 병원에서 생길 만한 에피소드도 잊지 않고 챙겨 넣었고, 조연들의 이야기도 억지스럽지 않게 마무리지었다. 요즘 방영됐던 어떤 드라마도 이 정도의 성의(?)를 보인 적이 없어서 극작가와 연출가 모두에게 호감이 생길 정도다. 애초의 방영 분량보다 1회가 더 많아져서 그런가? 아니면 초반에 한 번 쉬어간 덕분일까? 어찌 됐건 이 정도의 진행에 이 정도의 마무리라면 응원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중간에 흩어진 호흡-서브 남주에 대한 지나친 이입-은 아무래도 눈 감아 주기 어려울 흠이다. 특히 마지막까지 그를 배려한 공항씬은 정말이지 지나쳤다. 그전에 자연스레 마무리할 수 있는 순간은 제법 있었는데.
최근 들어 이혼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많아졌다. 얼마 전에 종영한 [식샤를 합시다]와 [세 번 결혼하는 여자]도 그랬고, 최근에 문화방송에서 방영중인 [앙큼한 돌싱녀]도 그렇고, [응급남녀]도 그렇다. [세결녀]를 제외한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이혼한 사람들이 아니라 결혼 후 1~3년 내의 성급한 이혼 부부라는 점, 이들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아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이혼사를 다룬다는 점이다. 최근 젊은 층의 성급한 이혼 풍속을 포착하고 기획된 것일 텐데, [식샤~]야 이혼이 주된 이야기거리가 아니니 논외이고, [앙큼한 ~]과 [응급남녀]는 실제 이혼의 디테일을 살렸던 점에 있어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다. [세결녀]는 재벌에 대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실감하기는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은수(이지아 분)의 태도와 결단은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라 논란거리가 됐던 부분도 있어 한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어쨌건 그 모든 '이혼 드라마'에서 [응급남녀]는 칭찬 받을 만한 거리가 많은 드라마가 됐다. 기본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쫓아가고는 있지만, 국천수라는 멘토 캐릭터도 성공시키고, 병원 드라마의 재미있는 부분도 살렸다는 점 그리고 이혼 후의 문제과 그 극복에 대한 낙관적인 사례를 소개한 셈이라 그렇다. 물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기 어렵다. 이혼 부부의 끔직한 뒷얘기들을 종종 듣고 있고, 실제로 뉴스가 되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하니 더 그런 줄 알고 있다. 그래도 지지고 볶아대던 그들이 다시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는 하나의 가정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는 한다. 일단, 지금은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고, 낭만적인 결론 하나 품고 가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니 말이다.

또 하나, 등장인물들이 하나하나 매력있었다는 점도 이 드라마의 훌륭한 점이다. 송지효는 러닝맨으로 일궈낸 코믹한 캐릭터로 그녀 인생에 최초의 성공적 드라마를 건졌고, 최진혁은 조연으로만 소모되던 이미지를 이번 기회에 버릴 수 있어 좋았고, 이필모는 섬세한 눈빛 연기가 가능한 멜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만방에 떨쳤다. 최여진의 매력이야 말로 다 못하겠지만 이번에도 성격와 능력을 겸비한 멋진 의사로 나와 멋졌다. 게다가 클라라도 기존의 뻔한 섹시 이미지에서 벗어나 귀여운 여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였으니 이 아니 좋은가. 문제는 중반 이후 이필모에 그 모든 비중이 옮아가 드라마의 균형이 휘청거렸다는 점인데, 그 덕분에 국천수라는 캐릭터의 과거를 알게 됐으니 밑진 건 없는 것 같다. 어찌 됐건 그 모든 쿵쾅거림은 끝났다. 우리들의 주인공 진희와 창민이는 다시 결합하든 어떻든 적어도 의사로는 잘 살아갈 것 같다. 응급 환자가 몰아치는 전쟁터 같은 그 곳에서 서로 손을 곡 붙잡은 채 말이다. 그런 의사들이 있다면 병원 가는 일이 두렵지만은 않을 것 같다.


메릴 스트립의 존재감_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영화 보기

제목 메릴 스트립의 존재감: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주제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은 호화로운 캐스팅을 전면에 내세운 다른 작품과는 좀 다르다. 물론 부담스러울만치 화려한 배우의 면면이 강하게 남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메릴 스트립, 줄리아 로버츠, 이안 맥그리거, 줄리엣 루이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크리스 쿠퍼, 더모트 멀로니, 아비게일 브레슬린 등 주조연급의 배우들은 영화 속 역할의 비중보다는 확실히 중량감이 있다. 덕분에 그들이 펼치는 연기는 매번 울림이 크고 여운이 남는다. 그러나 다른 스타캐스팅 작품과 다른 부분도 있다. [오션스 일레븐(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2001)]으로 시작된 호화캐스팅 영화의 전형은 그런 스타들 각자를 잘 분배해서 알뜰하게 그들의 장기와 매력을 뽑아내는 데 있다고 하겠다. 아니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웨스 앤더슨 감독 ,2014)]처럼 비중이 적더라도 순간적인 에너지를 끌어내 영화가 무르익게끔 돕는 방식으로 운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스타 캐스팅을 하되 그들이 무난하게 감춰지도록, 역할 안에 그들이 숨어 있어 크게 영화를 좌우하지 않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물론 그런 방식에서 전적으로 예외인 배우도 있다. 바로 메릴 스트립이다. 그녀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맨 처음부터 영화가 끝나는 가장 마지막까지 가장 자주 화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가장 많은 대사를 소화해내기도 하면서 자신의 깜냥을 있는 힘껏 드러낸다. 그녀가 쥐고 있는 이야기가 사건의 결정적 열쇠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전체의 이야기를 꿰어 내는 바늘처럼 기민하게 움직인다. 오직 그녀만이 영화의 온전한 주인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시종일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바이올렛'이 된다. 휘청거리고, 약에 취하고, 독설을 내뱉고, 비아냥거리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메릴 스트립을 보고 있자면 연기의 한 전형, 훌륭한 연기의 모범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배우들은 고분고분하게 조연의 자리로 확실히 물러난다. 굉장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각각의 배우가 무대의 배경처럼 한발씩 혹은 두발씩 물러서 있는 모습이라니. 절제가 장관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독특한 영화라 더 인상적인 작품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원작은 그저 해당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기와 공간에 대한 지명(August: Osage County)일 뿐이다. 오클라호마 안에 있는 카운티 지역에서 8월 삼복 더위에 일어나는 이야기. 어쩌면 그렇게 단순한 제목이기에 영화의 이야기가 더욱 극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가족영화라 지레 짐작하고 갔다면 극적인 반전의 순간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으리라.

여성이 주인공인 흔한 가족 영화가 그렇듯 이 작품에서도 여성은 다소 피해자이면서 가족에 대한 희생과 사랑을 자신의 삶의 기반으로 알고 있다. 세 딸, 시인이던 남편과 더불어 살아온 한 여인의 삶. 표면적으로 그녀는 약에 취해 사는 구제불능의 노인이지만 남들이 모르는 그녀의 속내는 그리 안녕치 않다. 그녀가 영화 내내 보여주는 기이하고도 불쾌한 행동 역시 모두 남다른 인과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사건이다. 모든 미스테리가 차곡차곡 그 속을 드러내는 순간은 그러나 기묘하게도 아침 한때, 모든 것이 시작하려고 몸을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 그래서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걸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던 옛 어른들의 말씀이 하나도 잘못된 게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교훈적인 영화. 그러나 사실 가장 아팠던 것은 메릴 스트립이 던졌던 독설 중에 틀린 게 없다는 사실. 그리고 가장 어리석어 보이던 캐런(줄리엣 루이스 분)의 마지막 일갈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가야 하는 길, 뻔히 다 알고 있지만 눈 감고 살아야 하는 일. 그런 대사에 새삼 마음이 아리는 걸 보면 인생을 알기에 아직 한참 멀었다 싶다. 아니, 나 역시 뻔히 알지만 차마 그리 살지 못하는 까닭에 이처럼 부대끼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어서.

그렇지만 이 영화는 꽤 훌륭한 영화다. 모든 노인에 대한, 아니 모든 슬픈 여성에 대한 이해심이 우러나와서가 아니다. 내가 가진 슬픔과 괴로움이 어쩌면 공인된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 헛되고도 우스꽝스러운 삶을 위해 안간힘 쓰고 사는 스스로의 눈에 어떤 희망의 단서가 보였다는 것 때문이다. 여름이 지나고 나면, 오사지 카운티를 벗어나면 혹시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안, 그게 아니라도 모두가 떠나버린다고 해도 지켜줄 무언가(혹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일견 달콤했다.

언제나 동화처럼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화 보기

제목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언제나 동화처럼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은 언제나 잘 그려진 일러스트 북 같다. 아름답고, 정제되어 있고, 빈틈이 있다 한들 그조차 아름답다.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그랬다. 시각적 이미지의 완성도가 뿜어내는 아름다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감탄을 쏟아 내곤 했다. 그런 반면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사람들의 욕심과 편견 그리고 선의가 먹히지 않는 추악함에 대해 그만큼 열심히 풀어놓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물론 동화가 펼쳐 내는 듯한 흠없는 방식은 아니다. 어딘가에선 피가 흐르고 또 누군가는 눈물을 흘린다. 그래도 그의 세상 속에서는 그런 상처까지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지극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식이랄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개봉 소식을 듣고 솔직히 설렜다. 뭐랄까? 굉장히 예쁘장한 것들을 원없이 보게 되겠구나 하는 심정이 들었다. 역시 그 기대는 원없이 채워졌다. 정말이지 모든 게 참으로 예뻤다. 심지어 호텔 내부의 안내판 글씨체에서부터 얼굴에 잡힌 흉터까지도. 케이크의 패키지가 예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소박한 호텔리어의 숙소에도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했다. 호텔의 스위트 룸이 주는 거창함은 없었지만 단촐함이 주는 혹은 낭만을 꿈꾸게 하는 여지가 아늑함을 줬다.

뛰어난 배우들의 라인업에 대해서는 굳이 다시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늘 그랬고, 이번에도 역시 그렇다. 틸다 스윈튼, 랄프 파인즈, 시얼사 로넌, 에드워드 노튼, 윌리엄 데포, 주드 로, 오웬 윌슨, 레아 세이두 등 연기력도 걸출하고 외모도 뛰어난 배우들이 모두 모여 있다. 그들은 모두 제 몫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였고, 그렇다고 해서 한 화면에서 넘치는 법도 없었다. 감독이 요구하는 만큼의, 그 몫의 역량을 최대한 보여준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그 완벽한 구조와 캐릭터 설정, 그것을 구현하는 세트 디자인과 코스튬이 완벽하게 맞물릴 때 가치를 발한다. 그가 아니고도 스타일에 치중하고 그 효과를 최대화하려는 감독은 많았지만 웨스 앤더슨만큼의 독특함은 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가 구현해 낸 세상은 비할 데 없이 사랑스럽다. 일관되게 추구해온 복고적 취향, 이야기 자체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건축물의 구조, 사건 전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난 음악, 그리고 바보스러운 순박함이 끌어내는 행복한 결말 등은 그 숱한 영화 속에서 앤더슨의 작품이 새로울 수 있는 근거들이다.

적들이 우글대고 선의라곤 찾아 보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이런 낭만 혹은 동화같은 완전함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놓치지 쉬운 것들에 대한 아련함.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는 그런 살뜰함이 담겨 있어 반갑고 그리웠던 모양이다. 매번 다치고 넘어지면서도 다시 살아갈 힘을 내는 것은 이런 계산되지 않은 낭만이 어딘가에 존재하리라는 희망 때문이지 않을까?

이뤄지지 않더라도, 헛된 것에 불고하더라도 꿈꿀 미래가 있는 사람의 얼굴은 밝다. 아무리 많이 지녔어도 과거에만 얽매인 사람은 어둡다. 그러므로 어찌 됐건 웃을 수밖에 없다.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한발 내딛을 수밖에 없다. 일단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다시 시작.

고스트 로맨스 미미_첫사랑과 제대로 재회하기 위해서 TV 읽기


이명세 감독의 영화 [M](2007)의 흥행은 끔찍한 수준이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감독상을 받아 흥행에서의 아쉬움은 메워졌을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란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주연을 맡았던 강동원과 이연희에 대해서도 연기에 대한 혹평이 이어졌다. 강동원은 전작 [형사]를 이명세 감독과 하고 난 다음에 연이었던 작품이라 기대를 받고 있었고, 이연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연기력 논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문제적 감독 이명세. 그 조합은 사실 흥행을 기대하기도 평론에 있어서의 각별함을 기대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묘하게도 이명세 감독은 그 이후 상업장편영화 제작이 결정되지 못했다. 공중파에서 다큐를 찍거나 독립영화에 가까운 영화를 찍는 정도이다. 내막을 모르는 상황에서 하기에 조심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영화 [M]은 이명세의 감독 경력을 끝장낸 영화다. 혼자 하는, 혼자 즐거운 영화는 그만두라는 경고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명세 감독의 상당한 팬이었던 사람조차도 [M]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려움을 호소한 적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런 원작으로 시작하는 드라마라니. 그것도 전형적인 SM 드라마에 최강창민이라니.

한숨부터 나왔다. 물론 최강창민의 연기자로서의 역량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문제의 이연희와의 사전제작 드라마 <파라다이스 목장>(2011)에서도 최강창민만큼은 또래의 아이돌 출신에 비해 꽤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좀 산만하고 억지스러워서 그의 역량이 덜 돋보였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의외였다. 원작이 있고, 게다가 강동원이지 않은가? 비교될 건 뻔하고, 비주얼로 승부하던 원작에서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다행이라면 4부작이라는 것. 하긴 단순한 이야기라 4부작 이상으로 늘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 <미미>는 영화 [M]보다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있어서 친절한 편이다. 영화의 러닝 타임보다 2배 이상이기도 하고, 알 수 없을 정도로 뿌옇던 느낌도 한결 나아졌다. 대사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야기며 설정이 보다 설득력을 갖추게 되었다. 사실 영화를 보던 내내 도대체 왜 한민우가 기억을 잃었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해지지 않았다. 미미가 고스트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왜 한민우가 기억을 잃고 헤매는지, 도대체 왜 저 소녀의 그림자를 뒤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드라마는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히 해결했다. 그리고 미미와 민우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화해 준 덕분에 민우의 내러티브가 효과적으로 형성됐다. 어둡고, 해결할 수 없고, 도저히 속내를 모르겠던 민우를 좀 더 알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시 어떤 이야기의 경우는 도저히 이미지로 대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게 이 드라마가 보여준 성과라면 성과일까?

영화든 드라마든 대중가요든 이미지와 텍스트는 상보적이어야 한다. 전적으로 문학이거나 미술이 아닌 다음에야 상호 보완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종종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서로를 참조한다. 다른 장르의 맥락이나 서사를 가져와 자신의 장르 안에서 재해석하는 일은 잘못된 일도 아니며 기피해야 할 일도 아니다. 요컨대 서로 배타적으로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영화감독들 중 일부는 실수를 한다. 특히 미술 전공의 감독들이 하는 실수다. 시각적인 완성도에 집착해서 서사를 놓치는 실수를 간혹 하곤 한다. <그대 안의 블루>(1992)의 이현승 감독이 봉착했던 문제도 바로 그 지점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의 데뷔작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이 있었던가? 전지현과 이정재의 망작 <시월애>(2000) 외에는 찾기 힘들 지경이다. 최근 들어 옴니버스 영화를 제작하다 신세경, 송강호의 <푸른 소금>(2011)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에 천착하는 그의 문제는 극복되지 못했다. 이는 김기덕 감독의 경우와 좋은 비교가 된다. 물론 김기덕 감독 역시 통상적인 미술 전공자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미술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작품 여러 곳에서 그런 징후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놓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숨기기는 하지만 관객에게서 완전히 멀리 가지는 않는다. 스타일이 강할 뿐, 자신이 하려던 이야기에 대한 집착은 무시무시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 안에서는 그림과 이야기가 멋지게 조우한다. 이명세 감독은 미술전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각적 이미지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드라마가 제작되고 나서 그의 맹점이 다시 한번 뚜렷해졌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다. 물론 이명세 감독이 이것을 교훈삼거나 자극받을 리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것까지 바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원작자로 이 드라마가 구현한 이야기의 형태를 다시 한번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영화만으로는 그렇게 슬프고 아름다운 첫사랑 얘기였는지 진정 알기 어려웠다.

살면서 우리가 실수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닐까? 정작 중요한 것은 달리 있는데 엉뚱한 데 집착하느라 놓쳐 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이번 드라마의 아름다운 결말에 흐느끼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중요했던 것, 나를 살게 할 그것은 정작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살아야 하므로 안타까운 심정, 그립고 가슴 저린 마음들은 묻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추억은 추억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거기에 그대로 둔 채. 우리에게 첫사랑이란 그런 깨달음을 주는 존재이리라. 너무 늦지 않은 때에 깨달을 수 있다면 행운이겠지.

'식샤'가 끝났다. 그런데 식샤가 도대체 뭐야? TV 읽기


먹방과 싱글 라이프를 효과적으로 섞었다는 찬사와 함께 출발했던 "식샤를 합시다"가 드디어 16부를 최종으로 막을 내렸다. 초반에는 무척이나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수경의 필요 이상의 까칠함과 구대영(윤두준 분)에 대한 의심이 오래 지속되고, 범인으로 지목하기까지 하는 등의 에피를 겪으며 그 기대가 줄어든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실망스러웠던 것은 생각보다 맛있게 먹어주지 않는다는 점. 의심할 바 없이 맛있게 보이는 음식들도 배역들이 먹기 시작하면 좀 억지스러웠다. 정말로 맛이 없지는 않을텐데, 배 부른 상태에서 억지로 먹는 건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은 뷔페에 갔을 때와 일식 철판구이를 먹던 장면에서였다. 산해진미를 아우르는 뷔페, 어지간한 경우라면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던 오코노미야키 등을 앞에 두고서 배우들은 그렇게 열심히 먹어주질 않았다. 이건 여배우의 경우 특히 더 두드러졌는데, 입을 꽉 다물고서 감탄사만 쏟아 내며 씹어대는 장면은 실망스러웠다. 좀 더 맛있게 먹을 수는 없었을까? 혹은 싱글 라이프의 처절함을 보다 더 혹독하게 쏟아낼 수는 없었을까?
최근 들어 독거 가구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다양한 이유에서 혼자 살게 된 사람들, 그들의 열악한 주거 여건 혹은 그들의 영양상태 혹은 생활습관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여기저기서 다뤄 왔던 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된 경우나 극단적인 경우가 많아 "식샤"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러브라인이 나와도 미스테리한 이야기의 결말이 공개된다고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긴 했다.

낭만적인 싱글 라이프, 그에 대한 건 윤진이(윤소희 분)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 '로망이었는데'에서도 느껴진다. 미디어나 각종 텍스트에서 묘사되어 온 싱글 라이프는 화려하기 그지 없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싱글 라이프,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져 있고, 대부분의 어려움도 척척 해결되어 가는 삶은 누구에게나 로망일 것이다. 실제로는 생활비를 신경 쓰고, 관리비가 마음에 걸리고, 친구나 애인의 방문이 달갑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식샤'에서는 나올 듯 나오지 않고, 나왔는가 싶으면 사그라드는 방식으로 참조만 했다. 그럴 수도 있다. 상업적인 방송에서 리얼함만을 추구할 수는 없었을 테고, 리얼하기만 했더라면 구질구질하게 느껴져 환상 비슷한 게 나오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쉽기는 하다. 이 드라마가 표방한 것은 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잠깐이나마 달라질 가능성을 보기도 해서 더 그렇다. 원작이 일본의 <고독한 미식가>라고는 했어도 국내의 드라마는 달라도 참 다르다. 삼각관계도 아닌 오각관계까지 엮어내는 솜씨에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두 주인공의 마음이 엮이게 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그리 납득할 만큼의 묘사는 없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랑이라는 게, 남녀 사이의 마음이라는 게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일은 아니다. 그들은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고, 티격태격하는 동안 끌리게 됐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키스 장면의 난데없음은 참 뜨악하다. 먹방 드라마였으니 먹다가 생기는 해프닝으로 끌고 가려 했던 것일까? 그렇다고는 해도 러브라인이 너무 늦게 나온 점도 이 드라마의 힘을 약화시키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16부작이니 적어도 7~8부에서 그 단서를 보였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10회에서나 그런 실마리가 나타나니 호흡 조절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결국 우리 중 누구도 '식사'가 아니라 '식샤'가 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알려줄 것처럼 하더니 끝으로 달려가는 종안 갑작스런 미스터리 라인이 나오면서 휘발되고 말았다. 윤진이의 아버지가 갖고 있던 비밀(?)이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었을까? 택배맨이 갑작스레 나와서 같이 라면 끓여 먹고 할 때부터 참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그 덕에 결말은 국밥집으로 이어졌다는 게 아쉽고도 아쉽다. 물론 마지막 장면의 천양희 작가의 시는 참 아름다웠고, 드라마 전체의 취지와도 어울렸다. 그러나 어딘지 할 말을 제대로 못하고 바삐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본 듯하다. 나름 열심히 해왔던 배우들도 그 부분이 참 아쉽지 않았을까?

최종적인 결정은 극작가와 연출의 몫이다. 그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결말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케이블 드라마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근 들어 케이블 드라마가 상당한 수준의 작품성(<나인 >과 <텐>같은 경우)과 엄청난 흥행(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응사>의 경우처럼)이라는 실적을 낸 바 있는 이 상황에서 잘 될 법하다가 만 이런 드라마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패기있는 시작에 흐지부지된 결말이라니. 차라리 시즌 2를 만들어주면 안 될까? 러브라인 같은 거 빼고, 한국의 맛을 재구성해 줄 수는 없을까? 특히 혼자서도 멋적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그런 곳만을 골라서 보여줄 수는 없을까? 일부는 어울려 먹는 음식이 나와도 되겠지만, 초반의 취지, 원작의 본질에 어울리는 그런 음식과 식당을 좀 더 보고 싶다. 여러모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그래서 주말의 봄기운이 덜 달가워지는 그런 결말이다.

허망한 이야기, 어디에도 닿지 못한 마음들_로필 3 종영을 보고 TV 읽기

제목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 종영을 보고

이런 망작이 없다. 기대했던 일점의 마음은 중반을 넘어서며 접고 말았다. 도대체가 이 드라마의 역할들은 다들 참 고민이 없다. 거추장스러운 부모도 없고, 먹고 살 걱정도 없고, 떠난 연인에 대한 아쉬움도 없다. 그냥 하루하루 멋진 옷을 입고 예쁘게 웃으며 살아간다. 거기에 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강태윤(남궁민 분)이 너무나 간단하고도 쉽게 오세령(왕지원 분)과 다시 만날 때부터 그런 염려는 들었다. 아니 그보다 너무나 쉽게 마음을 접어버리고 신주연(김소연 분)을 만날 때 그 불안함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 과정이 너무 짧고 가벼웠다. 물론 16부작이라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주연도 아니니 덜 배려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좀 지나치지 않은가? 주연의 이야기가 탄력을 받고, 어떤 식으로든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주변을 받치는 조연들의 이야기와 역할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가 허술해지면서 주연이라 할 수 있는 앨런(성준 분)과 신주연의 이야기도 현실감이 떨어져버렸다. 아니 도대체 저들은 주인공이라면서 왜 연애의 주도권을 조연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거야 하는 질책마저 하고 싶게 만들었다.
신주연과 강태윤이 연애하던 그 순간, 주연이던 앨런은 그냥 거울 역할만 충실하게 했다. 여자 주인공이 원하는 지점에 놓인, 여자 주인공이 원하는 말과 행동을 도맡아 하는 거울. 그게 아니라면 과거에서 갑자가 나타난 일기장 구실. 그녀가 자신이 원래 어떠했는지, 어떤 삶을 꿈꾸었는지, 어떤 사랑을 원했는지를 깨닫게 하는 일기장.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앨런은 신주연이 아프면 간호하고, 취하면 데려오고, 힘들면 업어주고, 기쁠 땐 안아주는 거울이거나 일기장이거나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라도 충분했다. 왜냐 하면 "세상은 나 빼고 다 남이고, 그래서 신주연은 하나도 외롭지 않으니까". 이미 여러 번 대사로도 말했고, 이야기 전반에 녹아 있던 내용은 바로 저 부분이 아닌가? 새삼 동화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나? 기린이 기린이 아니고, 추억이 추억이 아닌 것처럼, 세상이란 현실이란 원래 그렇게 온통 남으로 둘러싸인 전쟁터다. 굳이 설탕을 바를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더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나머지 배역들의 연애사다. 정희재(윤승아 분)라는 역할은 논하고 싶지도 않다. 고시 준비하는 동안 뒷바라지한 남자 친구의 배신을 어쩌면 그렇게도 간단히 처리하는지, 이내 나타난 이우영(박유환 분)과의 연애는 어쩌면 그렇게도 완벽한지. 게다가 갑자기 자각해 회사를 관두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한달 무급 휴가로 안 되겠냐?"는 신주연의 대사를 넣지나 말든지. 요즘같은 취업 빙하기에 월급 넉넉하고, 스스로도 만족하고 있는 직장을 그렇게 쉽게 관둘 수가 있나?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라 어린이 드라마에서도 사용하지 않을 구성이다.
이민정(박효주 분)의 임신 역시 마찬가지다. 미혼모에 대한 사회인식이 어떤지 우리 모두 알고 있는데 그런 식의 전개가 가당키나 한가? 게다가 그렇게 자유연애를 지속해 온 여성이 피임도 하지 않았다니 이건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을 안 맞는다. 상대 남자 안민석(유하준 분)이 옆집으로 이사오는 에피소드도 참 어이가 없다. 그런 벼락 맞을 일이라니 이건 뭐 기적에 기적에 또 기적인 건가? 더 놀라운 건 하룻밤 상대인지 알았던 상대가 자상한 아빠가 될 준비를 상당히 갖춘 사람인 것. 마지막엔 달달할 듯한 장면도 넣어둬서 이 임신이 행복한 결혼으로 이어지겠구나 당연히 짐작하게 만들고 만다. 한마디로 허무한 결말인 것이다.

로맨스, 필요하다. 살아가기 힘든 여성들에겐 정말 절실한 게 사랑이다. 이건 짝이 있고 없고를 떠나 결혼 여부를 떠나 간절한 어떤 부분이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예쁘고 싶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받고 싶은 본능을 논외로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매력적으로 비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이 시리즈의 성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도 칙릿 드라마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식은 곤란하다. 현실성도 없고, 그렇다고 교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로맨스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실현가능성이 있어야 마음이 움직이지, 이런 식의 생뚱맞은 이야기는 성가시기만 할 뿐이다.
드라마에 나왔던 어떤 역할에도 마음이 가질 않기는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마지막까지 어여쁜 옷들은 원없이 봤다. 그러나 어디로도 가지 못한 어정쩡함은 그들의 옷에서도 느껴진다. 아무리 패션 관련 일을 한다고 한들, 그런 옷을 입고 일을 하겠는가? 그 아찔한 스틸레토와 몸에 달라붙는 드레스들, 그게 아니면 한껏 부풀려진 셔츠의 소매들은 잡지에서나 보고 싶은 옷들이다. 어찌 됐건 너무 과했고, 그래서 허공에 떠버렸다.

하다못해 신주연의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이라도 좀 더 세밀하게 다뤄주든가. 강태윤만 바보 된 듯한 상황, 거기에 오세령도 희생된 듯한 그런 찜찜함이 오래도록 남았다. 참 기분나쁜 결말이다. 도저히 축복해 줄 수 없는 심정이 드는 기묘한 드라다. 다음 시즌따위 기획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도대체가 로맨스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그냥 대책없이 달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시장 조사 제대로 해서 다시 할 게 아니라면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기획이다. 이런 기획은 시작도 말았어야 한다.




배우 얼굴 기억하기 영화 보기

배우 얼굴 기억하기

마리옹 꼬띠아르는 [러브 미 이프 유 대어(2003)]에서 처음 봤다. 당시에도 참 매력적인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잊고 살았다. [빅 피쉬(2003)]에 나와 반갑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내 잊었던 모양이다. 매번 그녀가 나온 작품을 인상적으로 보면서도 그녀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미드나잇 인 파리(2011)]속의 애드리아나가 그녀인지 몰랐다. 뿐인가. [러스트 앤 본(2012)]의 스테파니가 그녀인 것도 못 알아 봤다. 심지어 [인셉션(2010)]의 멜이 그녀인지도 몰랐다. 언급한 세 작품은 다 정말 흥미롭게 봤고, 그 역할에 대한 상당한 호감도 갖고 있었다. 이런 증세가 처음이면 마리옹에 대해서만 그런가 보다 할텐데 이 비슷한 증세는 에이미 아담스에게도, 레아 세이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걸 보면 분명 내게 안면 인식장애가 있나 보다 싶다.

에이미 아담스는 [마법에 걸린 사랑(2007)], [다우트(2008)], [선샤인 클리닝(2008)]에 이르기까지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그냥 예쁜 배우구나 했을 뿐. 더 기가 막힌 건 [줄리 앤 줄리아(2009)]와 [마스터(2012)], 그리고 최근의 [아메리칸 퍼즐(2013)]에 이르러서도 같은 사람이란 걸 인지하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절정이다. 특징이 없는 얼굴도 아니고 역할 소화를 못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레아 세이두는 본 작품이 적으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고작해야 [시스터(2011)]과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뿐이니 말이다. 필모그래피에 [미드나잇 인 파리(2011)]가 있긴 한데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아주 비중이 적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제일 심한 게 에이미 아담스. 적어도 여섯 작품을 봤는데 왜 기억을 못할까? 게다가 그녀는 모든 작품에서 주연이었다. 마리옹 꼬띠아르는 잠깐씩 나오는 역할인 적이 많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에이미 아담스는 정말 뭘까? 좋게 보면 그녀가 번번이 자신의 역할로만 충실하고 그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역할 소화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자신의 시그니처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개성이 덜 강한 얼굴을 갖고 있기도 하다. 분명 아름답기는 하지만 어디 특징이 강한 스타일은 아니다. 변명을 찾자니 구차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마리옹 꼬띠아르는 그렇게 치부하기엔 너무 강한 얼굴이다. 레아 세이두 역시 마찬가지. 개성이 뚜렷한 배우인데 왜 인상적이지 않았을까? 두 역할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그런가? 사실 [시스터]의 그녀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그녀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둘 다 매우 도발적이고 과감한 역할이긴 하지만 머무는 지점이 너무 다르니 말이다.

자레드 레토도 사실 마찬가지다. [레퀴엠(2000)]의 그를 얼마 전에 본 [미스터 노바디(2009)]로 연결짓기는 참 어려웠다. 그 사이 기간도 길었지만 얼굴보다 강하게 남았던 게 [레퀴엠]에서의 마약에 취한 연기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미스터 노바디]의 네모는 너무 뻔한 느낌의 미남자라 그리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본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은 다시 한번 그에 대한 생각을 뒤집었다. 정말 세 인물 사이에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단지 역할 차이만은 아닌 듯하다. 매번 가죽을 벗겨내는 듯한 변화가 그에게 있는 듯하다.

앞서 언급된 모든 배우들에게도 사실 그런 뛰어난 연기력은 있다. 이전에 맡았던 역할과의 현저한 차이, 아니 역할과 배우와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뛰어남이 있다. 물론 이들이 매번 언급되는 초특급의 배우가 아닌 탓도 있는 것 같다. 헐리우드에서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배우들은 아무래도 어떤 식으로든 인상이 남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히려 바로 그런 점이 그들의 장점은 아닐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어떤 역할을 연기해도 고스란히 자신으로 남는 스타보다 적어도 이들은 배우로서의 이름을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칭찬과는 별도로 얼굴을 인식하는 보다 나은 눈을 연마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아무래도 이 증세는 좀 심하다. 뇌세포 어딘가에 생긴 문제인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1 2 3 4 5 6